
“여기까지 협상했는데 계약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비즈니스 현장에서 계약을 앞두고 흔히 나오는 말이다. 여러 차례 회의를 하고 견적서를 수정했으며 상대의 요구에 맞춰 조건까지 조정했다. 협상에 이미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계약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불리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약서에 서명한다. 하지만 협상의 목적은 계약 자체가 아니다. 나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으로 거래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 점에서 협상 결렬은 반드시 실패라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이 1억원 규모의 납품계약을 협상한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에는 상당한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매업체가 협상 과정에서 납품가격을 15%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납기를 앞당기고 결제기간도 기존 30일에서 90일로 연장해달라는 조건까지 제시했다.
계약금액만 보면 여전히 큰 거래다. 그러나 원재료비와 인건비, 물류비, 자금 부담을 계산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매출은 늘지만 이익이 거의 남지 않거나 주문량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손실이 커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1억원짜리 계약을 놓칠 수 없다”며 서명한다면 좋은 협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협상에서는 ‘계약을 했는가’보다 ‘어떤 계약을 했는가’가 중요하다.
소상공인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다. 단체 고객이 대량 주문을 조건으로 큰 폭의 할인과 무료 배송, 추가 서비스까지 요구할 수 있다. 매출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가 실제 계산에서는 정상가격으로 소량 판매했을 때보다 이익이 적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노딜(No Deal)’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이다. 현재 조건으로 거래하는 것보다 거래하지 않는 편이 낫다면 결렬도 하나의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특히 협상에서는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미 세 차례 회의를 했고 제안서를 여러 번 수정했으며 출장비까지 사용했다는 이유로 불리한 계약을 계속 추진한다면 과거에 들어간 비용과 노력에 끌려 미래의 손실을 선택하는 셈이다.
앞으로 얻을 이익과 부담을 기준으로 다시 판단해야 한다. 연봉협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높은 연봉을 제안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좋은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업무 범위와 책임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크거나 근무조건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벗어난다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그렇다면 협상장을 떠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안’이다. 협상에서는 현재 협상이 결렬됐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BATNA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이번 계약이 안 되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다.
다른 거래처가 있고 다른 공급업체를 찾을 수 있으며 다른 취업 기회가 있다면 상대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줄어든다. 반대로 대안이 전혀 없다면 불리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거절하기 어렵다.
따라서 강한 협상력은 협상 테이블에 앉은 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만들어진다. 거래처를 다양화하고 시장가격을 조사하며 다른 선택지를 준비해야 한다. 대안이 많을수록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힘도 커진다.
다만 협상장을 떠난다는 것은 화를 내거나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 조건으로는 계약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가격이나 결제조건이 조정된다면 다시 논의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기준을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대화의 문을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결렬된 협상이 상황 변화에 따라 한 달 뒤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오히려 상대가 내가 무조건 계약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수 있다. 반대로 합리적인 기준 이하에서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태도가 분명하면 상대도 자신의 조건을 다시 검토할 가능성이 생긴다.
좋은 협상가는 모든 계약을 성사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해야 할 계약과 하지 말아야 할 계약을 구분하는 사람이다. 협상에서 ‘예’라고 말하는 능력만큼 ‘아니요’라고 말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반드시 실패한 협상은 아니다. 손실이 예상되는 거래를 피하고 더 나은 기회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것 역시 협상의 성과다.
때로는 계약서에 서명하는 용기보다 펜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협상의 진짜 힘은 상대를 반드시 이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 앞에서 협상장을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갖는 데 있다.


